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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통산 170승’의 에이스 김일융

‘한일 통산 170승’의 에이스 김일융

 

1984년 한국시리즈 7차전에서 맞선 자이언츠와 라이온즈의 선발투수는 각각 시리즈 여섯 경기에서 3승씩을 나누어 가진 최동원과 김일융이었다. 한 경기를 적게 던지고 하루를 더 쉬고 나온 김일융이 좀 나을 것인지, 그래도 일곱 살이 어린 스물일곱 청년 최동원이 나을지 알 수 없는 만신창이의 결전이었다.

삼성은 2회 말 배대웅과 송일수의 적시타로 3점을 만들었고, 6회에는 오대석의 홈런으로 4점째를 올렸다. 롯데는 3회 초 김재상이 한 점을 뽑아냈고, 다시 7회 초 한문연과 정영기의 적시타로 두 점을 따라붙었다. 8회 초, 3대 4로 뒤진 자이언츠는 1사 후에 김용희와 김용철이 나란히 안타를 치고 나가 1·3루에 안착했다. 안타 한 개면 동점을 만들고 다시 역전을 노려볼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러나 그 순간 투수는 한국시리즈 20이닝에서 단 2점을 내주고 있던 0점대 평균자책점의 김일융이었고, 타자는 20타수 2안타만을 기록하고 있던 1할의 타자 유두열이었다. 라이온즈 응원석에서는 그것을 믿고 있었다.

그러나 눈치가 빠른 이들이라면 이미 불길한 예감을 떠올리기도 했다. 쓸 데 없이 1루에 힘없는 견제구를 던지고 몇 번이고 모자를 고쳐 쓰며 땀을 닦아내는 모양. 그리고 더그아웃과 내외야 이쪽저쪽을 둘러보며 텅 빈 시선을 흘리는 모양. 그 순간 김일융의 몸짓은 왠지 두 해 전의 이선희를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불펜에서는 황규봉과 권영호가 몸을 풀기 시작했다. 그러나 김영덕 감독은 여전히 김일융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에이스 김시진마저 연패와 부상으로 주저앉은 마당에, 그런 결정적인 순간을 맡길 수 있는 선수가 그 말고는 달리 없었다. 몇 번 더그아웃을 응시하던 김일융도 체념한 듯, 마음을 가다듬고 투수판에 발을 올렸다.

원 스트라이크 원볼, 그리고 3구. 김일융이 던진 공은 유두열의 무릎께로 날아갔다. 직구였다. 그러나 힘이 없었다. 그리고 낮았다. 유인하겠다는 적극적인 의지가 실려 있었다기보다는 가장 치열한 전장에서 한발짝 물러서려는 무의식 속의 소심함이었다. 물론 정교한 선구안을 가진 타자라면 결코 건드리지 않았을 공이다. 그러나 앞선 타석에서 아주 오랜만에 안타 한 개를 기록하며 힘이 오른 ‘공포의 1할 타자’ 유두열의 방망이는 이것저것 가리지 않았다. 그는 그 낮은 공을 퍼 올렸고, 까만 밤하늘 아래 둥실 떠오른 하얀 공은 왼쪽 펜스를 넘어 스탠드 중단에 내려앉았다. 역전. 6-4.

3루를 돌아 홈으로 이어지는 길 위에 자이언츠의 모든 선수들이 쏟아져 나와 진을 쳤다. 환호하고 축하를 받으며 유두열이 그 짧은 꽃길을 느리게 느리게 통과하는 동안 김일융은 고개를 돌려 전광판을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어야 했다. 전무후무한 한국시리즈 4승과 한국시리즈 MVP의 영광을 통째로 맞은 편의 최동원과 유두열에게 넘겨주는 순간이기도 했다.

 

‘3단계 커브’를 던졌던, 다른 세상에서 온 선수

원년 2할에도 채 미치지 못하는 승률로 리그 자체를 위기감에 빠뜨렸던 삼미 슈퍼스타즈가 장명부라는 재일교포 투수 한 명으로 이듬해 3위까지 수직상승하는 것을 목격한 모든 구단들이 재일교포선수 영입에 나선 것은 1984년이었다. 그리고 그 해 OB 베어스와의 치열한 경합 끝에 삼성 라이온즈가 이적료와 계약금, 연봉을 합해 5천5백만 엔이라는 거금으로 낚아 올린 최대어가 김일융이었다. 자금력에서 뒤진 OB가 ‘그돈이면 차라리 연습장을 하나 짓겠다’며 물러설 정도였다. 그래서 뒷날 경남 창원에 지은 OB 베어스의 연습구장 이름을 한동안 ‘니우라(김일융의 일본 이름) 구장’이라고 불렀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장명부가 빈볼도 아끼지 않는 심리전과 상대의 버릇 하나도 놓치지 않는 꼼꼼한 분석력으로 승부세계에 또 하나의 차원을 열어주었다면, 김일융은 공 하나로 한국야구에 그 이상의 충격을 던졌다. 비록 자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왼손투수로서 시속 150킬로미터 가까이 치솟으면서도 타자의 무릎 밑으로 정교하게 파고들었던 직구. 이것 하나만으로도 압도적이었다.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포수의 등 뒤쪽에서 보면 마치 탁구공이 날아오는 듯 춤을 추던 변화구였다.

한두 개의 변화구만으로도 충분히 승부가 가능했던 것이 당시 한국야구의 수준이었다. 그러나 김일용은 누구보다도 빠른 직구를 누구보다도 정확히 의도된 곳에 꽂아 넣는 능력에 더해 안쪽과 바깥쪽, 위와 아래로 변화하는 다양한 변화구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같은 궤적의 커브 하나를 가지고도 서너 단계의 속도 조절을 하는 ‘3단계 커브’를 구사하는 선수가 바로 그였다. 이름하여 ‘느린 커브, 더 느린 커브, 아주 느린 커브’

당시 기자들은 김일융의 변화구를 정확히 분류해 이름 붙이지 못했고, 타자의 얼을 빼놓는 기막힌 삼진 장면을 중계하는 순간 해설자들은 종종 말을 더듬어야 했다. 그는 하나의 단순한 선으로 이루어져 있던 세계에 짜임과 얽힘과 굴곡의 새로운 차원을 만들어낸 선수였다고나 할까. 어쩌면 당시 독고탁이나 구영탄 같은 야구만화 주인공들과 함께 등장하던 미국이나 일본 출신 초고수들의 원형이 아마 김일융이 아니었을까.

 

일본 ‘고시엔’의 스타

시즈오카 상고 1학년 때 그 유명한 고시엔(일본 효고 현에 있는 야구장으로 매년 전국 규모의 고교 야구 대회가 열린다. 일본의 고교 야구선수들은 고시엔에 서는 것을 큰 영광으로 여긴다)에서 모교의 준우승을 이끌면서 전국적인 관심을 끌기 시작한 김일융은 졸업과 동시에 숱한 화제를 뿌리며 일본 국민의 70%를 팬으로 확보하고 있다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스카우트되었다. 그리고 몇 년간의 적응기간을 끝낸 뒤로는 명실상부한 팀의 에이스로 활약하며 78, 79년에는 연속으로 15승을 기록하는가 하면 1977년부터 2년 연속 평균자책점왕에 오르며 전국적인 인기를 누렸던 선수였다.

그러나 1980년대로 들어서면서 프로 입단 초기에 당했던 팔꿈치 부상이 재발해 부진이 장기화되자 구단은 재기불능이라는 판단을 내렸고, 그의 트레이드를 추진했다. 그리고 마침 ‘부메랑 효과(트레이드한 선수가 재기해 친정팀의 앞길을 막는 것)’의 걱정도 없는데다가 막대한 이적료까지 제시한 한국의 삼성과 사정이 맞아 들어갔다.

일본에서의 마지막 3, 4년간 1군과 2군을 전전하며 중간계투로나 간간히 마운드에 올랐던 그는 한국에서의 첫 해였던 1984년, 곧장 14번이나 완투를 하고 4번의 세이브도 기록하게 된다. 마구잡이로 투입되며 무려 222이닝을 던졌고 16승과 2.27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 당시 일본과 한국 프로야구의 수준 차이를 보여주는 성적이기도 했지만, 말도 통하지 않는데다가 로테이션이라든가 보직이라는 개념도 없는 척박한 땅에서 악전고투 끝에 얻어낸 성공적인 재기의 증거였다.

역전 3점 홈런의 악몽을 뒤로하고 맞이한 1985년, 라이온즈는 한층 강해져 있었다. 포수 이만수는 홈런과 타점 부문을 석권했고, 장효조는 3할7푼 대의 압도적인 성적으로 타격왕에 올랐다. 그리고 원년에 이선희가 그랬듯, 너무나 충격적이고 안타까운 굴욕 앞에서 혹 그대로 저버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마저 자아냈던 원투펀치 김시진과 김일융이 나란히 25승을 올리며 공동 다승왕에 올랐다. 그 해 그들은 한국시리즈마저 생략해버리며 간단히 통합우승컵을 가져가버렸다.

그 해 김일융은 첫 해보다도 많은 226 이닝을 던졌고 2.79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 물론 그 해의 야구사에는 269.2이닝을 던지며 2.00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한, 그리고 같은 25승을 올리며 김일융보다 하나 적은 5패만을 기록한 김시진의 이름이 더 크게 새겨져 있다. 그러나 ‘토종 에이스’로 관리되고 보호받은 김시진에 비해, 김일융은 더 강한 상대와의 대결에 내세워지곤 했고 유무형의 차별이 있었음도 분명한 사실이었다. 시즌 내내 김시진에 비해 조금 빨랐던 승수 사냥의 페이스는 막바지에 ‘조정’되었고, 결국 나란히 25라는 숫자에서 맞추도록 하는 데는 김영덕 감독의 역할이 있었다.

해마다 열 번 이상의 완투를 곁들여 200이닝 이상을 던지며 평균 20승을 올려주는 투수. 지금 FA 시장에 나온다면 당장 100억 정도의 평가는 받을 그런 초특급 투수로 자리 잡은 김일융에게 1986년은 삼성과 계약한 3년의 마지막 해였다. 그 해, 김일융은 무리한 등판 후유증과 당뇨병, 그리고 향수병 때문에 138.2이닝 밖에 소화하지 못하는 부진에 시달려야 했다. 물론 2.53의 평균자책점과 13승 4패의 성적은 여전히 그의 단단한 구위를 증명했다. 하지만 그는 분명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 구단들의 생각은 달랐다. 일본 시절보다도 변화구의 구질이 다양해진데다가 강속구로만 윽박지르는 단순한 패턴 대신 완급을 조절하며 완투하는 능력이 길러진 것을 주목했다. 어쩌면 체계 없는 등판 요구 속에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체득했던 완급조절의 지혜가 생각보다 큰 상품성으로 다듬어진 것이 아닐까.

시즌 뒤 김일융은 일본 센트럴리그 다이요 웨일스로 이적했고, 삼성은 애초에 요미우리에 지불했던 이적료의 세 배인 3천만 엔을 챙길 수 있었다. 그리고 만으로 서른여섯 살이 된 김일융은 그 해 11승을 올리며 ‘컴백상’을 수상하고, 올스타전까지 참가하며 화려하게 복귀했다. 그는 일본 프로야구에서 한국에 오기 전까지 80승, 한국을 다녀간 뒤에 다시 36승을 보태 통산 116승을 올린 투수로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 한국에서 기록한 54승을 보탠다면, 한일통산 170승이라는 경이적인 기록이 된다. 그는 한국에서 뛰었던 모든 투수들 중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넣을만한 업적을 남긴 것이다.

 

향수병을 이겨내고 재기에 성공한 ‘밤의 신사’

그의 별명은 ‘밤의 신사’였다. 밤 경기에 특히 강했고 언제나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경기진행, 경쟁자 김시진이야말로 팀의 에이스’라고 엄지손가락을 세우며 웃던 매너 덕에 붙여진 수식어였다. 그러나 항상 여유롭고 넉넉했던 웃음 띤 표정 뒤에서 그는 일본에서보다 더 까칠한 관계 속에서 밀려오는 향수병과도 싸워야 했고, 또다시 살아남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그 결과 그는 성공과 좌절의 궤도를 재기로 올려 세우는 데 성공했고, 어리지도 않은 시절에 당했던 혹사 후유증에도 불구하고 마흔이 넘도록 선수생활을 이어가는 경이적인 모습마저 남겨줄 수 있었다.

한 때 숱하게 오고 가며 선진야구의 기술과 충격을 선물했던 ‘야구 전도사 집단 재일교포들. 그 중에서도 이 땅을 재기의 발판으로 삼아 가장진한 땀방울을 흘리고 돌아간 김일융의 이름은 특히 두드러진다. 그래서 그 대단했던 구위와 성적 외에도 그렇게 그가 맞서 싸워야 했던 또 다른 적들을 떠올린다면, 그의 업적과 기록 위에 한번 더 크게 박수를 쳐주어야 하지 않을까.

 

참조 :  꼴찌 ‘삼미 슈퍼스타스’의 서글픈 스타 장명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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