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격수를 넘어 야구를 개척하다
2003년과 2004년은 현대, 2005년과 2006년에는 삼성이 한국시리즈를 제패했다. 그러나 그 4년 내내 우승의 열쇠를 쥐고 있던 것은 박진만이라는 유격수였다. 박진만이 현대의 내야를 지휘할 때는 현대가, 삼성의 내야를 지킬 때는 삼성이 우승컵의 주인이었다. 유례없던 9차전까지 이어진 끝에 폭우 속에서 승부가 갈린 2004년이나 연장 15회 무승부의 혈전이 이어졌던 2006년의 벼랑 끝 승부에서, 고비마다 내야안타를 병살타로 바꾸어내며 무너져가던 투수를 다시 일으켜 세운 유격수의 가치는 단순히 타율과 타점만으로 수치화될 수 없다. 야구경기에서 뛰어난 유격수의 가치란 바로 그런 것이다.
그러나 그 대단한 박진만이 양준혁 만큼 나이를 먹도록 지금의 활약을 더 이어가지 못하는 한, 혹은 그 이상 활약을 보여준다 해도 영광스럽게 받아 안고 살아야 하는 수식어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제2의 김재박’이다. 김재박은 그저 훌륭한 유격수가 아니라 대한민국 명유격수의 원형이기 때문이다. 비틀즈나 서태지의 전성기를 기억하지 못하는 젊은 음악가들에게도 그들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있는 것과 같이 말이다.
유격수의 발견, 김재박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일본에 극적으로 역전승했던 그 대회 최종전을 기억하는 이들은 제일 먼저 김재박의 ‘개구리 번트’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6회까지 일본 선발 스즈키에게 노히트노런으로 눌린 채 0-2로 끌려가다가 김정수의 2루타로 한 점을 만회하고 다시 보내기 번트를 성공시켜 1사 3루의 찬스가 이어진 8회말. 스퀴즈 번트를 예상하고 멀리 빼는 투수의 공을 향해 김재박이 뛰어오르며 번트를 대는 기상천외한 장면을 연출했던 바로 그 순간 말이다.
그 때 그의 배트를 맞고 3루 쪽 파울선을 따라 나란히 굴러간 공은 내야안타가 되어 동점을 이루었고, 그렇게 살아나간 김재박은 결국 한대화의 홈런으로 홈을 밟으며 결승득점을 만들어냈다. 김재박의 천재성이냐 사인 미스 때문에 생긴 해프닝이냐를 놓고 지금까지 논쟁이 이어지고 있지만 분명 80년대 이후 우리 야구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명장면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김재박은 개막한 프로 야구의 열기 속에서 야구의 세계에 서서히 빠져들던 소년들의 가슴에 결코 잊을 수 없는 명장면들을 그 대회 내내 연출하고 있었다. 그는 잡아낸 땅볼을 1루로 송구하는 동작으로 상대편 3루 주자를 기만해 홈에서 잡아내는 유격수였고, 상대 외야수가 잠시 방심하는 틈을 타 평범한 안타로 2루를 점령하는 주자였다.
그 무렵 그의 플레이를 보고 투수와 포수를 제외하면 다 똑같은 ‘야수’ 라는 생각은 김재박에 의해 깨졌고, 우리는 유격수라는 또 하나의 포지션에 눈을 뜨기 시작한 것이다.
머리와 발로 승부하는 그라운드의 여우
고등학생 시절만 해도 그의 이름을 아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작은 키에다가 다리도 느렸던 탓이라고 스스로 말한다. 그는 명문 고등학교에서도, 명문대학에서도 원치 않는 선수였고, 그래서 오로지 야구를 계속하기 위해 대구와 서울, 다시 대구를 오고가야 했던 고단한 범재(凡才)에 불과했다. 그러나 대학과 군 시절을 거치며 뒤늦게 야구에 눈을 뜬 그는 1975년 처음 국가대표로 선발되었고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투수로 9이닝 무실점을 기록하는 한편 타자로도 4안타를 치며 우승을 이끌어 다재다능함을 과시했다. 이어서 한국이 처음으로 출전한 세계대회인 대륙간컵에서도 투타의 주축으로 활약하며 빠른 발과 센스로 국가대표팀의 주요 득점루트로 자리 잡았다.
1977년에 대학을 졸업하고 실업 무대에 등장하자마자 그는 대형 사고를 치고 만다. 그 해를 결산하는 종합시상에서 타격· 홈런 · 타점 · 도루 등 공격 주요 부문을 석권한 데 이어 신인왕, MVP 그리고 특별상으로 주어진 트리플크라운 상까지 무려 7개의 트로피를 독식하는 기염을 토한다(그해 올스타전에서 홈런 두 방을 날린 ‘미스터 올스타’ 역시 김재박이었다).
그 뒤 70년대 후반과 80년대 초반, 프로 출범 이전까지 한국야구를 대표하는 스타는 투수 최동원과 이선희 그리고 야수 김재박이었다. 77년 니카라과 슈퍼월드컵에서는 무려 426의 타율 (54타수 23안타)로 대회 타격왕과 최다 안타왕, 도루왕까지 석권하며 한국야구사에 첫 세계대회 우승의 영광을 안겼고 81년 대륙간컵에서도 대회 ‘베스트’의 유격수 부문에 선발되며 4위로 처진 한국 팀의 체면을 살리기도 했다. 매번 그는 남다른 집중력과 센스로 기록으로 나타난 것 이상의 기여를 했으며 경기를 직접 본 팬들에게 알 수 없는 매력을 심어주는 선수였다.
경찰 아저씨, 제발 김재박 좀 잡아가요!
그리고 1983년, 드디어 프로무대에 그가 나타났다. 프로 원년 서울 출신 선수들을 OB 베어스와 2:1로 나누어 고르는 드래프트에서 우선권을 쥐고 있던 MBC 청룡이 당장 쓸 수 없는 줄 알면서도 해외파 박철순을 포기하며 찍어놓았던 슈퍼스타 김재박이, 대회가 끝나면서 프로 무대로 합류한 것이었다. 소문으로만 무성하던, 세계선수권대회 때 TV를 통해서만 보았던 김재박의 플레이를 직접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김재박의 몸놀림은 승부 이상의 보는 즐거움을 주었다. 언젠가 청룡이 한창 잘 나가던 83년의 삼미 슈퍼스타즈와 맞붙었던 도원 야구장. 만원을 이룬 관중들 앞에서 힘을 낸 삼미의 중심 타자 김진우, 양승관, 이영구는 거푸 직선 타구를 날려댔지만 도무지 유격수 김재박의 글러브를 벗어나지 못했다.
김재박은 2루 베이스를 타고 넘는 타구부터 3루수마저 포기한 왼쪽 구석, 그리고 대타 금광옥이 때려냈던 까마득한 높이의 직선타구마저 껑충 뛰어오르며 잡아내버렸다. 그러자 경기 시작 전부터 악을 써가며 “김재박 바보” “김재박 에러”를 외쳐대던 옆자리 아저씨는 질렸다는 듯 풀썩 주저앉으며 통로 쪽 순경을 향해 중얼거렸다. “경찰 아저씨, 제발 저기 재박이 좀 잡아가요!”
혹 누가 빈 병이라도 집어 던질까이리저리 돌아다니던 순경 아저씨가 폭소를 터뜨렸고, 1루쪽 스탠드 전체가 쓴웃음으로 술렁였다. 완전무결, 철벽, 혹은 예술, 신기. 그 시절 상대팀 응원석에서조차 김재박의 플레이를 묘사하는 단어들은 그런 것들이었다.
그러나 사실 프로무대에서 보여준 것이 그의 모든 것은 아니었다. 초창기 프로야구 스타들이 대개 그랬듯 그 역시 프로야구가 개막했을 때 서른 가까운 나이였고, 장기적인 야구 인생 계획을 세울 수 없는 상황이었다. 또 과학적인 몸 관리의 혜택도 받지 못했기에 전성기를 길게 이어가기도 쉽지 않았다.
그는 84년과 85년 딱 두 번 3할을 넘겼을 뿐이고 통산타율도 .273으로 평범했으며 도루왕 타이틀을 거머쥔 것도 85년 딱 한 번뿐이었다. 90년대 이후에는 급격한 퇴조를 겪다가 마지막 한 시즌은 객지 인천에서 보내며 오랜 시간 친정팀과 등을 돌리고 있어야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불리한 조건 속에서도 그가 차지한 다섯 개의 골든글러브는 아직까지도 유격수로서 가장 많은 것이다(그의 제자 박진만이 2007년까지 다섯 개로 그와 같다). 또 프로 출범 이후의 플레이만 비교하더라도 아직은 그 누구도 유격수로서 김재박을 넘어섰다고 자부하지 못한다.
김재박이라는 선수가 없었다면, 80년대 초반 난데없이 경북고의 유중일이라는 유격수가 고교야구 최고의 스타로 떠오를 수 있었을까. 그리고 90년대 중반 이후 이종범, 유지현, 김민호라는 유격수들이 나타나고 주목을 받고 성장할 수 있었을까. 또 지금처럼 야구라는 스포츠에서 두뇌 플레이와 센스가 중요하다는 인식을 하고 있었을 것인가.
훌륭한 선수는 많다. 그러나 개척자로서 인정받고 존중받을 만한 선수는 흔치 않다. 그런 점에서 김재박에 견줄 수 있는 선수는 쉽게 찾을 수 없다.
참조: ‘슈퍼 에이스’ 최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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